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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쉬 Amish 문화 공감
아미쉬 역사 (1) 개혁자 중의 개혁자, 재세례파 본문
4세기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는 영적인 문제에 대한 유일한 권위로서 중세 유럽을 지배하였고, 그 지배력이 강해지면서 정치와 문화의 영역에까지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교황은 막대한 정치 권력을 행사하며 종교 영역을 넘어 세속적인 문제에 관여하고, 많은 성직자는 신앙인들의 진정한 영적 구원보다는 그들 스스로 속세의 풍요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교회의 부패에 개혁 요구가 끊임없이 이어져 왔으나 그때마다 소수의 개혁동조자들은 이단으로 내몰려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정치적, 도덕적으로 점점 권위를 잃어갔고, 1517년에 이르러 독일의 가톨릭 수사 修士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불씨를 댕겼다. ‘구원은 개개인의 깊은 신앙심에 대한 은총으로부터 얻는 것이지, 결코 교회의 성례전 聖禮典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그는 면죄부에 대한 강한 비판과 함께 교황청 교회의 구조와 교리에 대한 개혁, 이름하여 '종교개혁'을 주창하고 나섰다. 이에 동조하는 종교지도자와 독일 제후들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개혁운동은 유럽 전 지역으로 급속히 확산하여 나갔다.
그로부터 2년 후 1525년, 스위스 취리히Zurich에서는 신교의 목사인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가 지도자로 떠올라 '개혁파 교회the Reformed Church'를 설립하는 등 종교개혁의 선봉에 나섰다. 가톨릭교회 전통을 존중하며 반기독교적인 부분을 올바로 잡아가야 한다는 ‘온건적 개선주의’를 지향한 루터에 비해 츠빙글리는 가톨릭교회의 전통이 기독교 정신을 심하게 훼손하였으므로 성경에 따라 교회를 새롭게 세워야 한다는 '급진적 재건주의'를 견지함으로써 루터보다 더욱 강경한 개혁 성향을 보였다. 하지만 츠빙글리 또한 루터와 마찬가지로 개혁과정에서 지역 제후와 의회 등 정치 권력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민중들의 불만 속에 추종자 중 일부 급진 개혁 세력의 저항에 맞닥뜨렸다. 루터에게는 독일농민운동을 이끌며 저항한 토마스 뮌처Thomas Müntzer가 있었고, 츠빙글리에게는 개혁의 투명성을 강력히 요구하고 나선 소장파 급진 개혁그룹 ‘스위스 형제회 the Swiss Brethren'가 있었다.
젊은 지성파 콘라드 그레벨 Conrad Grebel, 펠릭스 만즈 Felix Manz, 조지 블라우록 George Blaurock 이 이끈 소장파 급진 개혁그룹은 츠빙글리가 취리히 시의회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지속하면서 개혁의 진정성을 잃어가고 있음에 저항하였다. 그들은 '교회와 정부의 완전 분리'를 통하여 정치 권력의 관섭을 배제한 '믿는 자들만의 자유로운 교회 a free church of believers only' 설립을 원했고, '무저항 평화주의', 그리고 비성서적인 '유아 세례' 대신 '성인 세례'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에 정부 관리들은 당시 세금 징수를 위한 신생아 출생의 유일한 근거로 삼아온 '유아 세례'를 부정하고, 군 징집을 거부함으로써 국가의 존폐와 지역 안보를 위협하는 그들을 범죄자로 몰아세웠다. 그들의 모임을 엄격히 통제하고 '유아 세례'를 지속하도록 명했다. 하지만 그들은 신생아는 선과 악을 구별할 능력이 없고, 지은 죄 또한 없으므로 태어나자마자 이루어지는 '유아 세례'는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성인이 된 후 이성적 판단 아래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한 진정한 세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당국의 감시를 피해 성인 교도들에 한하여 새로운 세례식을 강행했다. 이처럼 성인 교도에게 세례를 다시 받도록 한 연유에서 그들은 '재세례파Anabaptists'또는 '재침례파Re-baptizers'로 불리기 시작했다. 재세례파 교도들은 그들이 보인 급진적인 개혁 성향으로 말미암아 종교개혁의 큰 흐름 속에 '개혁자들 중의 개혁자'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법질서와 종교적 일체감을 해치는 반사회적 위험 집단으로 지목되면서 정부 관리와 가톨릭은 물론 개혁의 물결에 나선 여타 개신교파의 교도들로부터 혹독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정부 관리들은 재세례파의 지도자는 물론 이를 추종하는 일반 교도들까지 색출하여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몇몇 도시에서는 잡아들이는 재세례파 교도들의 숫자에 비례하여 돈을 지급하는 '재세례파 사냥꾼'을 고용하여 그들을 추적하게 했다. 이들에게 잡혀온 재세례파 교도들은 감옥에 갇혀 개종을 강요당하고 온갖 고문에 시달렸다. 뜻을 굽히지 않는 교도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나라 밖으로 추방을 당하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뿐만 아니라, 길가 나무에 매달아 불에 태워지거나 물에 던져져 목숨을 잃고, 심지어는 생매장을 당하고 전신이 토막 나는 등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되었다.
이러한 감시와 혹독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코 신념을 굽히지 않고, 모라비아Moravia, 알사스Alsace, 팔라티네이트Palatinate 지방과 네덜란드 등으로 넘어가거나 깊은 산속 또는 외딴 지역으로 숨어들어가 살기 시작했다. 그들은 감시의 눈을 피해 교도의 집이나 산속 동굴에서, 때로는 어두운 밤 물 위에 띄운 배 위에서 몰래 예배 모임을 가지며 교리를 확산해나갔다. 이때 자행된 잔혹한 탄압과 박해로 인해 희생된 재세례파 지도자와 교도들의 수는 정확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수천 명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들이 겪은 고난과 순교에 관한 구체적 사례는 1660년 네덜란드에서 발간된 책 《The Martyrs Mirror 순교자의 거울》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1200페이지에 이르는 거대한 분량의 이 책은 오늘날까지 아미쉬는 물론 재세례파에 뿌리를 두고 있는 여러 교파의 사람들에게 성서처럼 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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